수필54 이별사유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짧은 한 마디로 전한 안타까운 소식과는 별개로, 그 말투는 마치 어제 야식으로 치킨을 먹었다고 말하는 것 같이 담백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한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말의 화자가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들도 누군가를 사귀고 헤어지며 마음 아파할 수 있지만 다행이도 그 말을 한 아이에게는 이번 이별이 대수롭지 않은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다른 학교 남사친에게 설곤약을 건내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쯤되자 그 여자아이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하마터면 내 입에서 나갈 뻔 했던 말이 다행이도 설곤약을 받은 남자 아이의.. 2023. 10. 6. 청개구리 대모험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는데, 세탁기 배수관 옆에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녀석이 어떤 모험과 여정을 거쳤기에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초록의 작은 불청객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작은 청개구리가 징그럽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욕실 안에서 개구리를 마주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보며 처음 세운 계획은 조심스럽게 잡아서 마당의 풀밭으로 보내줘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쓸 데 없는 상상력이 저 작고 귀여운 개구리가 사악하고 징그러운 포식자인 뱀에게서 간신히 도망쳐 우리집 욕실로 피해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재생시켰다. 위협적이지도 않고, 해충도 아닌데다가 귀엽기까지 하니 스스로 욕실 밖을 나갈 때까지 그냥 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 2023. 9. 15. 두부조림 엄마가 돌아가시고 5개월 만에 누나와 조카들, 그리고 사돈 식구들이 동생과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놀러 오셨다. 대학생 조카들이 방학을 맞이하기도 했고, 누나도 휴가라서 오랜만에 다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가까운 계곡에도 놀러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늦은 밤 술 잔을 기울이면서는 언제나 함께 할 것 같았던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에 잠시 모두 생각에 잠기는 순간도 있었지만, 함께 있는 내내 행복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즐거웠던 시간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끝이 났다. 사돈 식구들, 조카들과 누나들이 떠나고 동생도 출근을 하게 되어 혼자 집에 남겨진 순간이 되자, 즐겁고 행복했던 만큼의 허전함과 아쉬움이 밀려왔다. 여럿이서 사용하던 식기들을 다시 찬장에 .. 2023. 8. 9. 집밥연가 엄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신지 두 달이 되어간다. 그 사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던 시간도 지나고, 숨 막힐 것 같은 슬픔과 상실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이제는 엄마의 사진이나 영상을 봐도 눈물대신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엄마가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엄마가 차려주시던 집밥 생각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내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으면 엄마는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며 밥과 반찬을 준비해주셨다. 특별히 맛있는 거창한 국이나 반찬, 기름진 고기가 없어도, 엄마와 같이 TV를 보거나, 말도 안되는 상황극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같이 웃고 밥을 먹었던 그 시간이 이제는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당연하지만 엄마가 살아 계실 땐,.. 2023. 4. 11. 이전 1 2 3 4 5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