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흑채는 위험해

by R첨지 2022. 5. 30.
반응형

 

 애처롭고 빈약한 머리숱을 가려보겠다고 종종 흑채를 사용할 때가 있다. 뿌린 날과 안 뿌린 날의 자존감 크기 차이가 제법 크기에 흰 옷을 입거나, 비나 눈이 오는 날, 그리고 모자를 쓰는 날이 아니면 자주 뿌리고 다니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 즐겨 사용하던 블랙 몬스터 흑채를 모두 사용해서 네이버 페이를 이용해 흑채 하나를 구입했다. 수요일 오후에 주문을 해서 금요일 오후에 상품이 도착했고, 토요일 오전에 외출을 하기에 앞서 모자를 쓰고 나갈까, 혹은 택배로 받은 흑채를 처음으로 사용해 볼까 잠시 고민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마침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어서 흑채를 사용하로 마음 먹고 택배 상자를 개봉했다. 

 

 다른 회사의 제품은 아직 사용해 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지만 블랙 몬스터의 흑채는 처음에 뚜껑을 연다고 해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헤어 캡을 열고 최초 사용시에 제거해야 하는 플라스틱 뚜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플라스틱 뚜껑이 좀처럼 열리질 않았다. 안내 홈페이지에 보면 잡아서 위로 올리면 쉽게 열리는 것처럼 나와 있어서 사진과 동일한 방법으로 열려고 했지만 플라스틱 마개가 단단히 닫혀서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 차례 끙끙거리며 열려고 노력하다. 결국은 덮개를 살짝 안으로 밀어넣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꺼내면 위로 올릴 수 있지 않을까해서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플라스틱 뚜겅을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그 순간 빡 소리와 함께 흑채가 폭발했다. 뭔가 더 참담하고도, 막막한 느낌이 나는 다른 기발한 말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고 싶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진짜 말그대로 폭발했다. 그 결과 흑채는 내 얼굴과 몸, 주변으로 사방팔방 흩뿌려졌다. 잠시 숨까지 멈추고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생각했다. 전력이 다 돼서 작동이 멈춘 로봇처럼 그대로 멈춰서 잠시 눈만 껌뻑였다. 

 “씨발…” 

 

정말 오랜만에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잠시 어떻게 이 상황을 바로 잡아야 할 지 머리속으로 실물레이션을 돌린 후에 먼저 손에 쥔 것은 진공 청소기였다. 욕실로 향했다. 먼저 입고 있던 옷을 조심스럽게 벗은 후에 샤워를 시작했다. 물줄기가 지나가며 흑채가 씻겨나간 자리에는 검은색 흔적이 남았다.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 바디워시를 이용하니 검은 흔적은 사라졌다. 하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뭍은 건 좀처럼 씻겨지지 않아서 세수를 다섯 번도 넘게 했다. 내 몸은 깨끗해졌지만 다음엔 욕실 바닥이 문제였다. 

 

 그러나 아직 정리할 게 산더미였기에 욕실 바닥을 당장 정리할 순 없었다. 다시 참사가 일어난 주방으로 돌아가며 진공 청소기를 챙겼다. 그리고 주방 바닥에 있는 흑채를 빨아들였다. 청소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흑채 새끼…아니 흑채가 존재감을 남기며 시커먼 흔적을 남겼다. 청소를 하는 게 아니라 숯을 가지고 주방 여기저기를 더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청소기를 끄고, 물티슈로 검은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검은 흔적이 더 넓어졌다. 그나마 위안 삼을 거라곤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가슴 속과는 반대로 그 검은 흔적이 점점 옅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얼마 간의 정리 과정을 거치자 암담하던 현장이 조금씩 정리가 됐다. 검은 흔적들이 사라질 수록 흑채를 향한 분노는 사그라들었지만, 반대로 플라스틱 뚜껑을 열 때 주의하라는 경고 문구 하나 넣어두지 않은 제조사에 대한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거나 얻게 되었을 때 주의 사항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편이라 플라스틱 뚜껑을 제거할 때 주의하라는 문구 하나만 있었다면 나는 애초에 주말 오전에 외출 준비를 다 한 상태로 새로 사고 딱 한 번 입은 옷을 입고 흑채를 개봉하지 않았다. 

 

 모든 정리와 뒷정리까지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은 나는 컴퓨터를 키고, 빠르고 강렬한 비트의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얼음물의 얼음을 오도독 소리가 나게 씹어 먹으며 리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참사가 벌어졌을 때 찍어 둔 사진도 있었다. 분노는 컸지만 저급하고 상스러운 욕설이나 어휘를 섞어가며 리뷰를 작성하진 않았다. ‘귀사의 홈페이지와 제품 안내 페이지에 경고 문구만 적혀 있다면, 제가 겪은 일을 다른 고객들이 겪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략 이런 어조로 장문의 리뷰는 어조만 정중했지 누가 읽어봐도 작성자가 매우 화가 났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리뷰였다.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흑채는 위험하다.

 

반응형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  (0) 2022.08.07
어쩌다 글 쓰는 게 좋아졌을까?  (0) 2022.08.03
코로나(ing) 리뷰  (4) 2022.04.13
5555원과 4444원 통장  (2) 2022.03.22
내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0) 2022.01.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