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구체적인 수치...그것도 단순한 숫자가 아닌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아, 기분 너무 좋다!" 대신 "오아! 이거 먹으니까 23,700원 정도로 기분 좋아진다."
라고 하면, 함께 맛을 본 친구가,
"그래? 난 그정도는 아니고 8,620원 정도의 맛인 것 같은데?"
라든가, 지치고 힘든 날에 한숨을 내쉬면서,
"후...오늘 5만원 4천원 어치 스트레스 받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유투브 콩트로 나오면 공감하며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긴 하겠지만 실생활에 적용하기에 나는 숫자와 계산에 치를 떠는 문과 출신이라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기분이 좋은 일이 생겨서 입가에 웃음이 떠날 줄 모르는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평소 입에 담기 싫어하는 욕설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화가 나는 순간에 미리 정해놓은 금액을 입금하는 통장을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좋은 감정과 그렇지 못한 감정을 발산하는 동시에 저축까지 할 수 있는 감정 저금통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처음엔 두 개의 입금 통장을 새로 개설할까 했으나, 요즘은 은행 어플로 웬만한 계좌는 통합으로 조회할 수 있게 돼 있어서 전에 만들어 놓고 거의 사용한 적이 없는 통장 두 개를 감정 기록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1월 초부터 시작한 감정 기록용 통장에는 2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상황에 맞는 돈을 입금하면서 입금자 명에 이런저런 내용을 적어가며 감정을 돈으로 모아두고 있다. 일명 오오오오 통장에는 고마운 사람의 이름이 남거나 기분 좋았던 이유를 간단하게 적고, 사사사사 통장에는 기분 나빴던 순간에 당사자에게 하지 못한 험한 말이나 욱하는 감정이 솟구칠 때 내뱉을 것 같은 말들을 남기는 중이다.
평소, 큰 스트레스 없이 긍정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2개월 동안 모인 금액을 보니 4444통장에 5555통장의 정확히 3배 정도 많은 금액을 모았다. 두 통장에 모인 금액은 옷 한 벌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는데, 쏠쏠하게 모인 금액을 보며 마냥 기분이 좋진 않았다.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겠지만 내가 평소에 기분 좋은 일보다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더 많았구나...하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기 때문이다.
이 돈을 얼마까지 모을지, 모인 돈은 어떻게 쓸 지 아직 생각해 놓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거나,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여행 자금에 보태지 않을까 한다. 긍정적 감정이든 부정적 감정이든 그걸 돈으로 모아서 사고 싶은 걸 사거나 가고 싶었던 여행 경비에 보탠다니...기분이 나빠서 4444원을 입금할 땐 당장 기분은 나쁘지만 이 돈 모아서 나중에 맛있는 거 먹거나, 사고 싶었던 거 사야지! 하면서 위로하고, 기분 좋은 일로 5555원을 입금할 땐, 기분 좋을 때 모았던 의미있는 돈으로 나중에 나에게 주는 기분 좋은 선물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기쁨이 더 커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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