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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서평]오버 더 호라이즌 -이영도 판타지 단편집-

by R첨지 202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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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이 묘사되어도 판타지라면 문제될 게 없다.

 

 판타지 소설은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소설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와는 거리가 먼 시공간을 배경으로 가슴이 웅장해지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기만 한다면 용이 등장하든 악마나 천사, 혹은 신처럼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판타지 소설의 매력에 한 번 빠져들게 되면, 내용이 아무리 길어도 끝까지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장편 판타지 소설의 매력은 제법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어 본 사람들이나 잘 아는 일이고, 이 쪽 장르의 초보자들이나 입문자들에게는 긴 호흡과 분량의 압박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가볍고 부담없이 즐길 수 있지만 재미와 작품성만은 어지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못지 않은 이영도님의 판타지 단편집 [오버 더 호라이즌]을 소개하려고 한다. 작품 소개에 앞서 작가인 '이영도'님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인 것 같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등을 쓴 이영도님의 이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998년 최초 발행 된 드래곤 라자로 데뷔한 이영도님은 한국 판타지 소설의 대중화와 상업적 성공의 가능성을 연 작가로 평가 받는다. 그의 대표작들은 앞서 언급한 드래곤 라자나 눈물을 마시는 새 외에도 [퓨처 워커]나 [폴라리스 랩소디], [피를 마시는 새], [그림자 자국] 등의 장편 소설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오버 더 호라이즌 같은 단편집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그의 단편집은 옴니버스식으로 짜여진 개별적인 짧은 이야기를 엮은 책으로 장편 판타지 소설의 양이 부담스러워 읽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영도님의 소설이 다른 판타지 소설과 차별성을 갖는 점은 쉽게 읽히는 문장과 웃음이 절로 나는 재치있는 상황, 그리고 단순히 치고박고 싸우거나 마법과 몬스터가 난무하는 내용이 아닌 가벼운 듯 가볍지 않게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이다. 오버 더 호라이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짧게 끝나는 단편 속에서도 독자를 서사 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그 흔한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개성 넘치는 사건과 장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내용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이 책의 제목이자, 단편집 첫 이야기의 제목이기도 한 ‘오버 더 호라이즌’은 이름난 명악기를 연주하는 세계최고의 엘프 ‘호라이즌’이 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의 일원인 은퇴한 음악 교수 '마파티'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러 온다는 소식에서 시작한다. 어떤 악기든 세계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는 호라이즌이 값을 메기기도 어려울 정도의 명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악기 소유자인 마파티 교수에게 다시 없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호라이즌의 별명이 ‘악기 살해자’라는 사실이었다. 호라이즌이 악기를 연주를 하고나면, 해당 악기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더 이상 감동적인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이 이야기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보안관 조수 ‘티르’는 그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악기를 부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연주했을 뿐인데, 그 후로는 악기의 생명이 다하다니…

 

 살아있는 생명체도 아닌 악기가 영혼이나 가능성을 빼앗기듯 더 이상 감동스러운 연주가 안 된다는 이야기는 누구라도 쉽게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바이올린의 소유자인 마파티 교수는 호라이즌이 자신의 바이올린을 연주하고나면 악기의 생명이 소실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음악을 사랑하는 전공자로서 호라이즌의 연주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권력이 막강한 사람이 억만금을 주며 바이올린을 연주하겠다고 찾아오면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는 마파티 교수지만, 좋은 악기가 세계 최고의 연주자의 손에 연주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평소의 점잖고 교양있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마파티 교수가 걱정되어 그의 집에 방문한 티르와 마파티 교수의 대화를 통해 전달되는데, 마파티 교수는 악기 살해가 가능하며,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티르에게 납득시키려 하고, 반대로 티르는 마파티 교수에게 악기는 살아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살해되거나 영혼을 빼앗길 수 없다며 반박하는 설전을 펼치는 부분이 너무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결국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악기 살해가 있을 수 있겠구나라고 납득을 시켜버리는데 전투나 신기한 마법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아도, 일상적인 듯하면서도 특별한 상황만으로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영도님의 능력이 감탄스러운 부분이었다. 

 

 본문에는 오버 더 호라이즌의 세계관과 등장인물이 그대로 사용된 ‘오버 더 네뷸러’, ‘오버 더 미스트’ 세 편의 이야기 외에 드래곤 라자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반가워할 등장인물 두 명이 등장해 단막극처럼 긴박하면서도 코믹스러운 사건이 전개되는 ‘어느 실험실의 풍경’까지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네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판타지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입문자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접근성이 좋은 내용이며, 편하고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 

 

 판타지 소설하면 주류나 명작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며 가볍고 오락적인 요소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영도님의 작품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팬심에서 주관적거나 편향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드래곤 라자는 한 때 교과서 지문으로 실린 적도 있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작품이다. 그러니 판타지는 유치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다양하고 색다른 내용의 소설을 읽고 싶다면 ‘오버 더 호라이즌’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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