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덱스터>라는 미드를 재미있게 봤었다. <덱스터>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눈앞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덱스터라는 인물이 그 때의 충격으로 살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이코페스로 성장하자, 덱스터 어머니가 살해당한 사건을 맡았던 경찰이 덱스터를 양아들로 키우며 체포되지 않은 살인범을 찾아내서 납치하고, 살인한 후에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법까지 훈련시켜 연쇄 살인범을 죽이는 연쇄 살인범으로 키운다는 내용이다.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연쇄살인범이 연쇄살인범을 죽이고, 대담하게 경찰서에서 혈흔 전문가로 근무하며 증거를 인멸하고, 평범한 사람인 척 살아간다는 자극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이었기에 매우 재밌게 봤던 드라마였다.
재밌는 점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인 덱스터가 연쇄 살인범들을 죽일 때마다 그를 응원하며, 덱스터가 발각되거나 체포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연쇄살인범을 죽인다지만 '살인'을 응원하다니... 혼란스러웠다. '선량한 시민들을 죽이고도 수사망을 피해 잘 살고 있는 살인범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죽인다. 과연, 덱스터의 행동을 옳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의구심을 갖다가도 '아니지, 그래도 죄없는 사람을 희생자로 삼는 것보다는 사회의 악을 처리하는건데 괜찮다고 할 수 있는거 아닌가?'라며 덱스터의 편에 서기도 하는 것을 반복하게 됐다. 어쩌면 <덱스터>라는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그런 내적갈등을 겪게 하는 방법으로 인기를 끌었던걸지도 모른다.
전자책 리디북스 추천작에 떠서 읽게 된 피터 스완슨의 스릴러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읽으면서도 드라마 덱스터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적 경험을 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희생되는 사람은 <덱스터>의 희생자들처럼 연쇄 살인범까지는 아니지만, 소아성애자, 바람 핀 남자친구, 살인을 저지르고 몰래 도망치려는 남자, 남편 몰래 주택시공업자와 섹스를 하는 여자를 '썩은 사과'로 정의하고 '추려내는 작업'을 하는 '릴리'를 지켜보며, 그녀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거나, 그녀가 체포되어 법의 처벌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 소설은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주인공 릴리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사람들은 생명이 존엄하다고 호들갑 떨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아요.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주인공 릴리의 말이다. 얼핏 보면 틀린 말 같지 않다. 하지만 썩은 사과를 고르는 것과, 썩은 사람을 판단하는 일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에, 소설 속 '릴리'의 말은 궤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썩은 사과는 단 번에 먹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썩었는지, 혹은 썩어 보이지만 실은 그 내면은 그렇지 않은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썩었다면, '추려내는 작업'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추려냄의 자격은 누가 주는 것인지...등의 수 많은 기준을 정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기준과 판단을 어떻게 릴리 같은 개인의 판단에 맡길 수 있을까?
흥미있는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작품이 좋은 감독과 캐스팅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담담하게 계획을 세우고, 빈틈없이 실행에 옮겨 결국은 살인에 성공하는 릴리의 모습은 영화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결말로 향할수록 이 책의 '릴리'는 '에이미 던'과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미 던'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악질 또라이'라면, '릴리'는 그것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길고 깊게는 아니지만,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일까 고민도 하고,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기도 하며, 부모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챙기는 면모는 <나를 찾아줘> 속의 에이미 던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모습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소설이 스릴러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영화화가 결정됐다. 책 맨 뒤에는 옮긴이의 말에 피터 스완슨이 주관적으로 바라는 희망 캐스팅이 소개되어 있는데, 혹시 그걸 밝히면, 앞으로 읽게 될 사람들의 등장인물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시킬까봐 밝히진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읽는내내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며 재밌는 스릴러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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