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영화가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입에 넣거나, 낯선 여행지에 막 도착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묘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 보기 시작한 영화를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했거나 호기심이 가는 내용이거나,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나오거나 해서 기대치가 높다거나, 평소에 좋아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어 기대치가 낮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가 시작할 때는 ‘이 영화가 재밌고 좋은 영화였으면 좋겠다.’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물론 영화가 진행될수록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라고 생각하게 되거나 반대로 환희에 찰 정도로 좋은 영화를 발견한 기쁨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거나, 나쁘지 않았다며 시간 잘 보냈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이렇듯 처음 보는 영화가 어느 정도의 설렘을 준다면, 두 번 째나 세 번째, 혹은 그 이상 여러 번 본 영화들은 익숙함과 편안함, 그리고 처음 볼 때는 몰랐던 새로운 매력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볼 때에는 줄거리나 갈등 관계를 파악하고 있고, 반전이나 결말까지 다 알고 있기에 처음 본 영화를 볼 때만큼의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케이블 TV나 명절 특선 영화로 방영되고 있는 영화들 중에서 채널을 돌리다가 멈칫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보게 되는 그런 영화들이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여러 번을 봐도 재밌는 영화들을 정리해봤다. 당연한 얘기지만 철저하게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기호가 반영된 목록들이다. 이 글을 보고 ‘아 맞아! 나도 이 영화 볼 때마다 재밌던데!’라고 공감하거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여러 번 본다’라고 새로운 영화를 소개해주는 반응을 기대하며 영화 소개를 시작하겠다. 작품 목록은 한글 자모 순으로 정리했으며, 헤아려보니 예상보다 작품 수가 많아서 두 편에 나눠 소개하려 한다.
500일의 썸머
로맨스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500일의 썸머를 포함한 몇몇의 영화는 논외의 대상이다. 조셉 고든 레빗(일명 조토끼)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여주인공인 주이 디샤넬이 독특하고도 사랑스러운 캐릭터 썸머를 연기했다.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20대 중반이었는데, 당시에는 영화에서 썸머가 한 선택을 욕하며 그녀를 가리켜 ‘나쁜 년’’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30대가 넘어가고, 이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영화의 흐름은 주로 톰의 입장에서 진행되지만 반대로 썸머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다.
나는 전설이다
윌 스미스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윌 스미스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인류가 바이러스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반려견을 친구 삼아 생존하고 있는 ‘로버트 네빌’의 고독함과 두려움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야행성 좀비처럼 변해버린 괴물들이 등장하는데, 네빌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피해 다니며 백신 연구를 위한 실험의 대상으로 쓰기 위해 사냥하기도 한다. 생존자인 네빌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들이지만 이 영화는 놀랍게도 괴물들의 입장에서 네빌이 얼마나 두렵고, 잔인한 존재였을지 생각해보게 한다. 혼자 살아남은 네빌은 전설적인 존재인 동시에 전설로 여겨질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다크 나이트
히어로 영화가 이 정도까지 고급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과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한스 짐머의 장중한 음악이 극의 분위기를 한층 무게감 있게 만들어줬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 특히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어떠한 의도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악을 광기 넘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히어로 영화들이 주인공과 빌런의 갈등을 물리적 힘의 대결로 표현하는 반면, 이 영화는 유희를 위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살인을 저지르는 순수악 조커와 아무리 악인이라도 목숨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수선 배트맨이 하비 덴트라는 인물을 자신들과 같은 인물로 만드는 과정으로 그려내는 상징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디스트릭트 9
SF 영화를 좋아하는데, 아직 디스트릭트 9을 보지 못했다면, 어디 가서 SF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외계인과 우주선만 아니었다면 외국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연출 방식으로 극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예측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이라서 결말을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한 저 예산 영화라고는 믿기 힘든 특수 효과와 액션은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신과 다른 것을 경멸하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재미도 있으면서 묵직한 한 방 같은 주제 의식까지 갖춘 SF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제격이다.
라따뚜이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괴물, 노인, 장난감, 청소 로봇 같은 비주류들의 땀과 노력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한결같은 픽사만의 색깔도 마음에 들지만 모든 캐릭터들에 녹아 있는 그 따뜻한 감성이 참 좋다. 그중에서도 라따뚜이는 쥐와 고급 요리라는 극단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서사 구조가 기발한 작품이다. 현실에서 시커먼 쥐가 파스타나 수프를 만들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 헛구역질을 할 것 같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편견 없이 이야기와 요리에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러브 액츄얼리
‘나 홀로 집에’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영화가 된 러브 액츄얼리. 이 영화를 못 본 사람은 있어도 그 유명한 피켓 고백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가족과 연인, 친구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리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족, 친한 사람들에게 사랑 고백, 혹은 사랑한다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게 만드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선사해준다.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좋고, 중간중간 웃음이 터지는 유머 코드도 취향저격이었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절된 이야기와 사건이 여러 개라는 피로감을 주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러 인물들의 서로 다른 사연을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같은 시공간적 배경에서 펼쳐지기에 특정 장면에서 동선이 겹쳐지거나 한 데 모이게하면서 그런 단점을 장점으로 발전시켰다.
범죄의 재구성
사실 나는 한국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용이 재미 유무를 떠나서 항상 비슷비슷한 배우들의 조합으로 늘 해오던 캐릭터를 연기하는 대략적인 틀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의 영화들은 그런 꼬투리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재밌는 영화가 종종 있다. 그중에 하나가 범죄의 재구성이다. 실제로 사기꾼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실제 사기 사건들을 각색하고 조합해서 사건이 흘러가는 것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배우들의 찰진 대사도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데, 몇몇 대사는 친구들과 있을 때 아직도 유행어처럼 사용할 정도다. 지금 딱 떠오르는 대사 한 마디는 극 중 월매가 입원한 병원으로 형사들이 찾아오자, 월매의 아버지가 형사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시느라, 어려움이 많으시쥬?”
세븐
나는 아직도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을 보면 두려움과 분노, 슬픔, 절망을 느낀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순 없지만, 지금까지 본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충격을 준 작품이 세븐이었다. 성서에 나온 7가지 죄악에 해당하는 사람을 심판하듯 죽이는 의문의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은퇴를 일주일 남긴 모건 프리먼과 열혈 신참 형사 브래드 피트가 한 팀을 이루게 된다. 두 사람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말고는 단서를 남기지 않는 범인을 잡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지만, 가치관과 경험, 수사방식 등 모든 것이 달라 좀처럼 수사에 진척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단서를 발견하고 범인의 은신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범인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이코패스였다. 앞서 언급한 모건 프리먼, 브래드 피트 외에도 기네스 펠트로우, 케빈 스페이시가 출연한 이 영화는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소림축구
주성치의 소림축구는 B급 감성 병맛 코믹 액션이란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영화다. 예측하기 힘든 타이밍에 터지는 웃음코드와 과장된 연출, 주성치 특유의 혼자 진지하면서도 얼빠진 연기는 이 영화 최고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피식피식 웃고 싶을 때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 크고 작은 웃음 포인트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쇠다리 주성치와 무쇠 머리 황일비가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다리 교차하며 앞으로 나가는 안무를 마친 뒤에 아무 반응도 없는 객석을 향해 뻔뻔하게 호응 유도하는 주성치 표정이 압권.
쇼생크 탈출
신사적이고 깔끔하면서도 통쾌한 복수극이자 탈출기. 이 영화야말로 질릴 정도로 봐서 결말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그 과정이 흥미진진해서 볼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흐름이 경박스럽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하고 편안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이 놀랍다. 점잖은 영화가 이렇게까지 재밌는 건 반칙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화 후반부에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과 함께 나오는 장면은,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소리만 틀어놓고 ASMR로 사용하고 싶어 진다.
- 나머지는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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