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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낯설음에 다가가기

by R첨지 20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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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바쁘거나 각박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30대 중반까지 혼자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친구나 가족들과 놀러는 다녀봤다. 하지만 그것은 ‘여행’이 목적이 아닌 술 마시고 물놀이하고 다 같이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유흥’이 목적이었다. 어딘가를 목적지로 정해놓고, 그곳에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본 진정한 여행은 그때까지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바쁘거나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 가봤다기보다는, 그런 여행의 필요성을 몰랐기에 안 가봤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를 보고, 혼자 떠나는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됐다. 

 영화는, 소심하고 평범한 중년의 남자 ‘월터 미티’가 회사의 기념비적인 필름을 분실하게 되고, 그 필름을 찾기 위해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나며 내적 성장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나는 영화 속 월터 미티의 모습에서 익숙하고 작은 세상 속에 살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여행의 색깔은 분명했다. ‘한 번도 안 가 본 곳으로 떠나기’ 그리고 ‘일정이나 계획없이 충동적으로 돌아다니기’, 마지막으로 평소라면 절대 안 해볼 행동하기’ 이 세 가지 결심만 가지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떠난 첫 여행지는 통영이었다. 아주 잠깐 해외로 나갈까도 생각해봤지만, 국내 여행지에도 안 가 본 곳이 많으면서 해외부터 나가려고 하는 것은 어쩐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 들고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중에 통영을 선택했다.

 

 통영은 내가 사는 지역과 거리가 멀고, 친인척이나 지인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뚫고 오랜 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통영에 도착했다. 잠만 잘 생각으로 미리 예약해 놓은 게스트 하우스에 가서 짐을 정리하고 통영 앞바다를 혼자 돌아다녀 봤다. 엄청나게 재미있다거나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경험은 아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새로우며, 내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시간을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내게는 큰 모험이었던 첫 여행지인 통영에서의 첫 날 밤에는 특별한 인연도 만날 수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 중에는 저녁에 여행자들을 모아놓고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곳이 있다. 내가 갔던 그곳에서도 약간의 회비를 내면, 그 날 온 숙박객들을 모아놓고 회와 치킨, 맥주 등을 마실 수 있는 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시 두 달 전 수능을 보고 갓 스무 살이 된 부산 친구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세 명의 여학생이었는데 그 술자리에서 친해져서 결국 그 아이들과 나는 다음 날에도 통영을 돌아다니며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부산 아이들의 사투리를 듣는 것도 즐거웠고, 눈 앞에서 회를 뜨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생선 머리까지 야무지게 발라 먹는 것을 보는 것도 새로웠다. 그 아이들은 세 명의 여학생이었는데, 그들과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 함께 여행을 다닌다. 

 

 좋은 인연을 만난 것과는 별개로 그 후에 이어진 모든 여행의 소감은 인상적이었다. 편한 자가용 대신 기다림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숙소는 호텔대신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어색함을 이겨내야 하는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했다. 블로그와 맛집 안내 어플을 검색하는 대신 돌아다니다가 배고플 때 가장 가까운 식당, 혹은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들이 추천해주시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겨울 여행이었기에 찬 바람을 맞으며 오랜 시간을 걷거나 기다리는 시간도 많았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코를 심하게 골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요리를 먹고, 명소를 돌며 아끼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 속에 섞이는 과정은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 자극을 느끼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비록 영화 속의 월터처럼 험난한 산을 오르고, 식인 상어가 있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화산이 폭발하는 산을 뒤로 한 채 죽어라 자동차 질주를 하진 않았지만, 오직 여행만이 줄 수 있는 낯선 것들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통영 여행이 끝난 후에는 틈나는 대로  강릉, 경주, 부산, 울산, 고양, 여수, 전주, 순천, 안동으로 여행을 다녔었다. 여행을 다니며 딱 한 가지 후회가 되는 것은 순간순간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지 않은 게으름 딱 한 가지였다. 모든 여행지가 저마다의 매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명소나 관광지 유무와는 관계가 없었다.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읽고 있던 책의 행간, 일상에서는 마주할 수 없던 낯선 내 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짜릿함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매력이었다. 

 저마다 여행에 대한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여행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런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낯설고 새로운 것은 그것만의 이로움이 있다. 여행의 매력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여행을 다녀온 후 주위 사람들에게 여행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함께 나눠 먹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처럼 내 주위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낯선 곳을 여행하며 느낀 진진함을 느껴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볼 것 없는 이 블로그의 글을 몇 명이나 읽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길에 오르기를 권하고 싶다. 당장은 코로나 19로 전처럼 자유로운 여행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은 바이러스에 대한 걱정과, 마스크로 인한 불편함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그런 시기가 와서 여행을 위한 시간이 없고, 돈이 없고,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까운 기차역으로 가서 제일 가까운 시간의 기차표를 끊고, 어디든 가서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오면 된다. 기차 창밖으로 내달리는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기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장소에서 평소라면 먹어보지 않을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그 시간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만으로도, 그 시간을 온전히 감상하듯 즐기는 것만으로도 낯섦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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