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고맙게도 내 곁을 지켜주던 친구들 중에 ‘내가 얘랑 이 정도로 친했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례식장을 지켜주며 이런 저런 도움을 준 친구가 있었다.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술 잘 마시고 좋아하는 사회인이었던 그 친구는 술 안 좋아하는 대학생이었던 나와 삶의 방식이나 색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그 후로도 자주 연락하거나 만나서 어울려 노는 정도로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다가도 지인들의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 장례식장이나 친구들의 결혼식에는 어김없이 나타나서 특유의 허세 섞인 농담과 유쾌한 태도로 친구들에게 웃음을 줬다. 어느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을 가더라도 그 친구는 늘 있었기에 그런 자리는 으례 그 친구를 만나는 날로 인식이 됐을 정도였다.
한 번은 그 친구가 술 좋아하는 다른 친구와 돼지부속 구이를 먹으러 가자며 나도 데려간 적이 있었다. 돼지 부속 구이는 처음이기도 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아서 반찬과 음료수만 깨작거리는 내게 그 친구는 이게 무슨 부위인데 이렇게 먹으면 고소하고 식감도 좋다면서 소금 기름에 고기를 찍어 내 앞접시를 계속 채워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손길을, 그것도 손 윗사람이 아닌 동갑내기인 친구에게 받고 있자니 뭔가 얼떨떨하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 친구가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10년도 넘은 일이지만 그 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아직도 남아 있는 그 부속 구이 가게를 지날 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이 난다.
그 후로도 그 친구는 대학생이어서 돈이 없다는 핑계로 밥 한 번 사준 적 없는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마치 막내 동생 챙기듯이 챙겨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친구에게 엄청 친근하거나 따뜻하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나를 만날 때마다 살뜰하게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고마움보다는 의아함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 친구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덕분에 전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는 여전히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 나타났고 변함 없는 레퍼토리로 흘러가는 농담과 허세로 웃음을 줬다. 서로의 삶이 바쁘기 전에는 그렇게 다같이 웃고 나서 술을 마시러 갔었는데, 친구들이 어느덧 하나 둘 결혼을 하고 각자의 삶에 충실하게 되면서 함께 뭔가를 하는 대신,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자는 형식적인 말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곤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고맙게 해 준 것 없이 내게 고맙기만 한 친군데, 어째서 나는 1년에 한 두 번씩 명절 때 만이라도 안부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오늘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년 전부터 몸이 아파서 누워 있다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프도록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는 미안함과 옛날에 내가 너 많이 챙겼으니까 나 아픈데 한 번 보러오라는 연락조차 하지 않은 친구에 대한 원망이 뒤엉켜 자꾸만 눈 주위가 뜨거워진다. 사실 믿기지 않는다. 그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서 앉아 있으면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특유의 허세와 농담으로 나를 웃게 만들 것 같다.
나도 이제 맛있게 고기 구워서 그 친구의 밥 공기 위에 올려주며, 이게 무슨 고기고 내가 어떻게 준비해서, 어떻게 조리한 고기라서 이렇게 먹으면 맛있을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친구를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마음으로 그 친구를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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