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오늘 가족들이랑 저녁 먹고 가서, 학원차 안 타요. 그리고 30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학원에서 아이들 출결을 관리하다보니 이런 류의 연락을 매일 받는 편이다. 올해 고 2가 되는 S의 전화를 받은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가족들이랑 외식? 밥 먹고 와? 맛있는 거 먹겠네? 선생님도 배고프니까 내 몫으로 두 숟갈 정도만 포장해 와.”
당연히 농담이다. 이 농담이 지향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말도 안되는 황당한 제안을 했을 때 이 녀석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는 재미고, 두 번째는 내 부탁에 어쩔 줄 몰라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는 재미다. 하지만 S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오는 내 농담을 많이 받아 본 녀석이라서 이런 식의 말장난을 받아치거나 빠져나가는 것에 능숙한 편이다.
“저는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힘들 것 같아요.”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바쁜 와중에 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음에 만족감을 느끼며 허허 웃었다.
예고한 것처럼 S는 30분 정도 늦게 왔다. 학원에 오자마자 S의 체온을 재기 위에 머리 쪽에 비대면 체온계를 갖다대는데 S가 내 착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 놓는다. 편의점에서 파는 스타벅스 커피였다. 이 녀석은 ‘선생님, 이거 드세요.’이런 말도 없이 무덤덤하게 툭하고 커피를 올려놓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향했다.
내가 무심코 던진 농담에 밥은 못 가져가더라도 뭐라도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편의점에 들러 맛있는 음료를 챙겨 온 그 마음이 참 풋풋하면서도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명절 연휴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면서 연락을 해 온 제자를 야단스럽게 칭찬하느라 수업 시작 전에
“XX야, 명절 연휴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연락도 해주고 고맙다. 선생님 막 감동해서 울 뻔 했잖아.”
라고 했더니,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다른 제자들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슬슬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퇴근 후에 집에서 쉬는데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중2 때부터 고3인 현재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는 제자가 커피와 조각 케익을 기프티 콘으로 보냈다.
그냥 이래저래 고생도 많고, 발렌타인데이 이기도 하고 새해도 돼서 보내는 거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원에서 명절에 인사 보내서 기특하다고 칭찬한 걸 의식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쯤되자 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할 때도 한 번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제자들의 용돈을 갉아 먹는 것 같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길에 내 차를 이용해 학원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아이들이 있다. 그 중에 누나들과 함께 등원하는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J가 있는데 오늘 이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하루 종일 가슴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학원 건너편에 주차를 하고 아이들을 차에서 내리게 한 후 길 조심해서 건너라고 주의를 주고 나는 차에 정리할 것이 남아 차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길을 무사히 건너서 학원에 잘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무심코 아이들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누나들 뒤에 서 있던 J가 고개를 돌려 나를 찾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그 아이는 내가 잘 오고 있는지를 살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이가 저런 세심한 배려를 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J가 아무 생각없이 이 쪽을 쳐다봤을 뿐이고, 단지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J는 한 번 더 내가 길을 잘 건너서 무사히 오고 있는지를 살피는 얼굴로 내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따뜻한 배려는 내가 길을 다 건너고 출입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문을 잡아 기다려주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짧은 순간의 작은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J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거나 금방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함께 공부한지 겨우 한 달 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 느낀 기분 좋은 따뜻함은 잠시 동안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동시에, 긴 연휴 뒤에 다시 직장으로 돌아온 월요병을 잊게 할 정도로 포근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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